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짐 코벳 (문단 편집) == 전설의 명[[포수]] == '''9살의 나이에 엽총으로 [[표범]]을 사냥'''함으로써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두각을 보였지만, 그가 위대한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히 어린 나이에 맹수를 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10마리가 넘는 식인 맹수들을 처치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첫 식인맹수 사냥감이 바로 참파와트(Champawat)의 식인 암컷 벵골 [[호랑이]]인데[* 이름이 참파와트가 된 것은 '참파와트' 지역에서 주로 활동해서다.], 이 호랑이는 무려 '''400명'''이 넘는 사람을 먹어치웠으며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결국 [[호환(재해)|호환]]을 견디지 못해 [[군대]]까지 동원되었고[* 사실 수만에서 수백만 명의 인구 중 200명 정도의 희생이라면 비율상으로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호환을 당하는 지역 마을이나 도시의 인구 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가 불과 몇 십명 정도의 피해라도 당하는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극도로 공포심이 확산되어 수천 명가량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실제 참파와트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지역은 사실상 사람들이 살지 않아 버림받은 지역이 되었고, 일대의 경제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괜히 군대까지 동원한 게 아니다. [[제보당의 괴수]] 사건도 똑같아서 군대가 출동한 거였다. 조선이 과거 호환에 대항하여 착호갑사를 동원했던 것도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네팔군]]의 추적을 피해 참파와트는 [[인도]]의 쿠마온 지방으로 넘어온다. 여기서도 수많은 사람을 잡아먹었고, 인도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참파와트는 그 모든 조치를 비웃듯이 활개치고 다녔다. 수많은 사냥꾼들과 [[구르카 용병]]들까지도 이 교활한 호랑이에게 농락당했고, 결국 '''436명'''째 희생자까지 나오고 만다.[* 현재까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동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다.] [[호환(재해)|호환]]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수백여 명의 인원을 동원함에도 이 영악한 호랑이는 잘만 피해다녔다. 이에 당시 [[영국 육군]] [[보병]] [[장교]]였던 코벳이 참파와트 사냥에 합류하게 된다. 코벳은 참파와트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참파와트가 몸길이 8피트(약 2.4미터)에 암컷이며 쇠냄새에 매우 민감해서 사냥꾼이 총을 들고 접근하면 쇠냄새를 맡고 귀신같이 도망가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벳이 한참 호랑이를 추적하고 있을 때 참파와트가 어린 소녀를 습격해서 끌고가는 사건이 발생했고, 코벳은 소녀의 핏자국을 추적해서 참파와트의 위치를 파악한 후 참파와트가 쇠냄새에 민감하다는 점을 역이용하기로 한다. 코벳은 지역 주민 수백여 명을 동원하여 소리를 내고 쇠 냄새를 풍기며 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도록 해서 호랑이를 자극하고 달아나게 한다. 코벳은 진흙과 동물의 배설물로 온 몸을 덮어서 쇠냄새가 풍기는 것을 철저하게 막은 후 호랑이가 달아날 곳을 계산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대낮 정오 무렵에 쏴 죽였다. 번번이 사냥에 실패하던 식인 맹수를 처치한 그 공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는 한 푼의 현상금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지방 영주들이 고마워하며 준 현상금을 "희생자들의 유족을 도우라"며 기부했다고 한다. 회고록에 의하면 '그런 맹수로 절망에 빠진 이들을 돕는 게 먼저 생각할 일'이라고 뜻을 밝혔다. 그 후 그는 11마리의 식인 [[호랑이]]를 더 사살하였으며, 그 공으로 [[훈장(상훈)|훈장]]도 받고 [[대령]]까지 진급하게 된다. 그의 총에 죽은 식인 호랑이들이 낸 희생자가 '''1,500명'''은 족히 되므로, 그 정도의 포상은 작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뭐 훈장도 받고 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꽤 풍족하게 살았지만. 그가 상대한 여러 마리의 호랑이 가운데 짐 코벳이 유일하게 두려워한 건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살던 '파월가의 독신자'[* 참고로 당시 인도에서 많은 [[트로피 헌터]]들이 노리던 개체로 코벳이 자신의 첫 저서인 <쿠마온의 식인 호랑이>에 이 개체에 관한 일화를 적었으나 사실 이 호랑이가 식인 호랑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란 수컷 호랑이라고 한다. 총 3번에 걸쳐 만났는데, 짐 코벳의 회고록에는 파월가의 독신자에 대한 평가가 경외와 공포로 가득하다. 일단 첫 만남부터가 드라마틱한데, 우타르프라데시 주가 1930년 독신자를 사냥하고자 그 일대의 숲을 모조리 벌목하게 되고, 살 곳을 잃은 독신자가 새로 이사한 곳이 집 근처의 숲이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짐 코벳은 독신자를 사냥하러 나선다. 어느 겨울 아침, 짐 코벳이 아침 흡연을 하며 주변 경관을 살피던 중, 자기 눈앞에 갑자기 독신자가 찾아왔다. 그는 코벳을 공격하지도 않고 근처 개울가에서 물만 마시면서 그냥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짐 코벳은 "내가 여태 만나본 호랑이 중에 가장 위엄있는 호랑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2번째 만남에서는 짐 코벳은 독신자를 사냥하기 위해 함정을 깔았지만, 이때 그 함정에 걸린 독신자의 카리스마와 덩치에 압도되어 평소답지 않게 눈 밑의 3cm 지점에 맞히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게 오히려 독신자의 성질을 건드린 바람에, 독신자는 당시 그 일대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이 상황을 직접 목격한 짐은 총을 재장전할 엄두도 못했고, 그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총을 든 손이 마비될 정도로 움직이지 못 하다가 후퇴해서 거리를 벌린 뒤 집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후퇴해서 목숨을 건졌다고...이튿날 하인 한 명과 함께 독신자를 추적하다가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독신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 호랑이가 가고 난 후 그가 있던 자리에 가보니 피웅덩이가 있어서 독신자를 놓친 걸 깨닫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근처 개울에서 다시 독신자를 만났는데, 이때는 정확하게 머리를 맞혔고 그제서야 독신자를 가까이서 대면하게 된다. 짐 코벳은 이때의 소감에 대해 "저 참혹한 상처! 그리고 저 끈질긴 생명력! 내가 쏜 짐승 앞에서 그토록 커다란 경의를 느껴본 것은 맹세코 그 때가 처음이었다."라며 자기 일생 최고의 숙적으로 평가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walgarh.jpg|width=100%]] || || [[1930년]], 파월가(Powalgarh)의 독신자를 잡았을 때의 사진 || 또한 그는 식인 [[표범]]도 사살한 바 있다. 125명을 잡아먹은 [[http://en.wikipedia.org/wiki/Leopard_of_Rudraprayag|루드라프라야그 표범]]이나 400명 이상의 사람을 잡아먹은 [[http://en.wikipedia.org/wiki/Panar_Leopard|파나 식인 표범]]도 그의 총에 최후를 마쳤다. 루드라프라야그 표범을 잡은 자리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식인 표범들이 입힌 피해까지 포함해 그가 사냥한 식인 동물들에게 죽은 피해자는 무려 '''2,000명'''이 넘는다. 이런 그의 업적 덕분에 그는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91%90|사두]]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인(기독교)|성인]] 급으로 추앙받았다는 소리다. 그가 마지막으로 식인 호랑이를 사냥했을 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 [[파일:48995220436_b203679212_b.jpg|width=100%]] || || 인도에 세워진 그의 [[흉상]]. || 이후 자신의 6번째 마지막 저서인 'Tree Tops'를 내고 심장 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이 책에는 짐 코벳이 그동안 기록해 둔 야생동물 외에, 케냐 국립 공원에서 보내온 날들과, 엘리자베스 공주와 조지 6세의 죽음에 얽힌 사건 내용까지 세세히 나와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